이 건물은 조선 선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종가에서 대대로 사용하는 종택이다.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16세인 명종 15년(1560년)에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문과 초시에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선조 9년(1576년)에 강동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후학을 양성하여 관서부자의 어필을 하사 받았다.
#관서부자 : 관서 유학자를 기리는 영예로운 칭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을 모으고 중화와 상원 등 여러 지역에서 공을 세웠다. 그 후 성주목사를 거쳐 1595년 안주목사가 되고 이어 성천과 정주의 목사를 역임한 뒤 그만두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고 이후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죽은 뒤 이조판서 벼슬을 받았으며 시호는 문간이고 저서로는 <지산집>, <가례고증>, <주역석해> 등이 있다.
영천 지산고택은 신광리 지일동마을의 야산 곡부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一’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 그리고 ‘一’자형 고방채가 튼‘口’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전면과 좌측면으로 토석 담을 두르고 살림집 우측 뒤의 높은 곳에 사당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5.5칸, 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낮은 외벌대 자연석기단에 덤벙 주초를 앉히고 대청 전면의 가운데 기둥만 원주로 하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워 상부 가구로 완성했다. 대청 배면과 방의 전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정지와 안방 사이에 쪽문을 두어 편의를 강구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정지·방·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영남 지방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3.5칸, 측면 3.5칸의 팔작집으로 낮은 두세 벌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퇴칸에만 원주를 세워 간결한 장혀수장의 삼량가로 완성했다. 특히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건너지르지 않고 기둥에만 짧게 표현한 독특한 양식이며, 대들보 위의 간결하고 멋이 있는 약식 파련 대공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특징은 조호익의 도잠서당에도 거의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영지길 117-9 (대창면, 지산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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