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을 한 분만 뽑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선택할 것입니다. 한 명을 더 고른다면 누가 생각나세요? 오늘 제가 소개할 인물은 거란의 2차 침입을 막아낸 양규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열세를 극복하고 기적처럼 승리하여 많은 백성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막았으며,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양규 장군 역시 이와 똑같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싸운 고려시대 최고의 명장, 양규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략
1010년, 고려의 서북면 도순검사였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켰습니다. 그 후 강조은 고려의 실세가 되었는데 그 당시 고려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와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이에 고려를 정복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후 다시 중원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당시에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했던 고려는 큰 피해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거란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10세기말,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트집 잡아 고려에 두 번째로 쳐들어왔습니다. 침략군의 병력은 무려 4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고려사의 위기
침공군이 처음으로 공격했던 곳은 강동 6주의 최전방인 흥화진이었고 그 흥화진을 지키는 고려의 장수는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순검사가 된 양규였습니다. 양규는 불과 수천 명의 병력만으로 40만 명의 거란군을 무려 1주일 동안이나 막아냈습니다. 최전방 진지가 방어에 성공한다는 건 방어 측에게는 엄청난 이득이고 공격 측에게는 굉장한 손해가 됩니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에도 끝까지 버틴 요동성으로 인해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에도 끝까지 버틴 안시성으로 인해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양규는 끝까지 흥화진을 사수하면서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수호하는 위대한 업적에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최대 병력이 동원된 통주전투
대군을 이끌고 와서 작은 진지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초조해진 거란의 성종은 군대를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우선 20만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흥화진 남쪽 무로대에 포진해서 고려 서북면 병력들이 남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직접 20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실세였던 강조는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고려군은 1차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2차 전투에서 대패하고 강조도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당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우리 역사에 있어 최다 병력이 동원된 통주전투입니다. 통주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려군의 지휘부는 궤멸되었고 주력군은 증발해 버렸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사상자는 대략 3만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휘부를 상실한 채로 뿔뿔이 흩어진 잔여 병력은 더 이상 전력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위조 편지로 항복 권유
이제 대규모 전투에서 거란을 상대할 전력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통주전투에서 승리한 거란의 성종은 고려군 총지휘관인 강조가 보내는 것처럼 위조한 편지를 흥화진으로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거란에게 항복하라는 강조의 명령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점령하기 어려우니 교묘한 수작을 부린 거죠. 강조는 비록 통주전투에서 대패했지만, 거란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처형당할 정도로 기개는 있었습니다. 항목 명령을 내릴 사람도 아니었고 게다가 위조된 편지를 받은 양규는 나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 아니다. 라며 결사 항전에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거란의 얄팍한 수작은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양규 장군의 은밀한 작전
비록 주력군이 섬멸되었지만 양교를 비롯해 요충지를 지키는 고려의 장수들은 매우 용감했고 유능했습니다. 거란은 고려 수비군의 완고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흥화진과 통주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나마 점령한 곳은 곽주성이었고 거란군은 그곳에 6000명의 수비군을 남겨 중간 보급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중간 보급 기지를 마련한 거란군은 서경을 공격했습니다만 서경 공략에도 실패했습니다. 고려 서북면의 병력은 당시 고려 최강 정예군이었고 그들이 지키는 성을 함락시키는 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거란군은 곧장 개경을 점령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고 개경을 향해 남하했습니다. 고려왕 현종은 이미 개경을 포기하고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한 후였고 거란군은 무혈입성하다시피 개경을 점령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거란의 2차 침입은 성공했고 고려는 망국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절체절명이 위기에서 양규 장군의 은밀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곽주성 탈환
양규는 단 7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흥화진을 나와 거란군의 포위멍을 뚫고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거란군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은밀히 움직이는 바람에 거란군은 양규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통주에 도착한 양규는 통주전투의 패잔병 일부를 흡수해서 1천 명의 병력을 보충했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몰래 곽주성을 공격해 6000명의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성을 탈환했습니다.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내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전면전이 아니라 소수의 결사대를 잠입시켜 몰래 성문을 여는 형태의 유격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곽주성을 고려군이 탈환함에 따라 전쟁의 흐름은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중간 보급 기지를 상실했으며 압록강부터 개경에 이르기까지 거란이 실효 지배하는 거점은 전무했습니다. 비록 개경 함락에는 성공했지만, 고립된 거란군은 이제 본격적으로 숨통이 조여지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거란군 철수 결정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 왕이라도 사로잡아야 승전으로 마무리하고 돌아갈 수 있는데, 현종은 이미 전라도까지 피신한 상황이라 추격하기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개경에 머물러 있자니 고려 각지의 병력들이 개경 근처로 집결하면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루한 소모전을 펼쳐야 했습니다. 결국 거란은 나중에 고려 왕이 거란으로 직접 찾아와 친조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형식적인 정신 승리만 한 채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곱게 물러난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고려인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현대사회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인구가 중요했습니다. 인구는 곧 노동력과 국방력을 의미했으며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건 고려에게 있어 크나큰 국력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곽주성을 탈환하여 거란군을 철수하게 만들었던 양교의 활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양규 장군의 활약
1011년 1월 18일, 양규는 불과 1700명의 병력만 이끌고 무려 20만 명의 거란군이 주둔하던 무로대를 기습해 2000명의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3000명을 구출했습니다. 다음날인 1월 19일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석령까지 후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해서 거란군 2500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인 1000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월 22일 여리참에서 다시금 후퇴하는 거란군을 공격해서 1000명의 적을 죽이고 고려인 포로 1000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3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이겼고 다시 위치를 이동해서 1월 28일 애전에서 후퇴하는 거란군의 선봉과 전투를 벌여 1000명의 적을 죽였습니다.
당시의 지명들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지리 정보 기록이 남지 않았으므로 양교의 정확한 동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면서 적을 공격하고 싸웠다 하면 모두 승리했으며 포로로 끌려가던 수많은 백성들을 구해냈습니다. 한 달 동안 7번 전투를 벌여 1개의 성을 탈환하고 대략 1만 명에 달하는 적을 죽였으며 포로로 끌려가던 3만 명에 달하는 고려 백성을 구출했습니다. 이 모든 업적이 불과 1700명만 이끌고 이룬 성과였습니다. 즉 양규는 병력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적과 맞설 수 있는 게릴라식 유격전을 통해 큰 전공을 세운 것입니다. 철수하는 거란군 입장에서는 양규 군이 몇 명인지도 어디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전쟁의 승패를 떠나 대부분의 거란군이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였던 애전에 갑자기 거란 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습니다.
양규 장군 전장에서 용감히 전사
양규는 거란군이 철수하는 길목마다 나타나며 유격전을 펼쳤는데 하필 그때 공격했던 길목인 애전이 바로 거란군 본대의 주요 철수로였던 것입니다.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대의 규모는 기록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침공군의 본대였으니 수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단지 1700명의 병력만 이끌던 양규로서는 신속한 퇴각이 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규는 상황을 오히려 거란 성종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700명대 수만 명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질 정도로 처절하게 분투하던 고려군은 전멸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생존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극한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당당하게 싸웠고 고려의 기개를 보였습니다. 그렇게 고려 최고의 유격대장 양규는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용감한 부하들과 명예로이 전사했습니다.
양규 장군의 업적
양규는 비록 전사했지만, 거란의 2차 침입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위업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첫째,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을 끝까지 지킨 덕에 거란 침공군이 둘로 나뉘어 전력이 약화되는 상황을 이끌어냈습니다. 둘째, 거란군의 유일한 중간 보급기지였던 곽주성을 기적처럼 탈환하여 거란군 본대를 고립시키고 전쟁 수행 능력과 수행 의지를 상실하게 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셋째, 철수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공격해서 최대한 적의 전력을 소모시켰고 포로로 끌려가던 무수히 많은 고려 백성을 구해냈습니다. 그 덕에 고려는 인구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거란의 3차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국력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유격전을 통해 메인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억을 거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거란이 3차 침입 당시 대규모 원정군이 아니라 유격전에 대응하기 수월한 기동성이 좋은 10만 명의 정예기병으로만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3차 침입에서는 오히려 고려가 평야에서 대규모 전투로 거란군을 압살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통주전투에서 패하면서 주력군이 소멸된 고려는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규는 극한의 불리함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무인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고려사'의 기록이 큰 흐름 위주로 서술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묘사가 없어 양규의 자세한 활약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디테일을 알 수 없다 그래도 요약된 업적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고려의 양규 장군은 불과 1700명 병력만으로 포기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쳐 거란군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장군들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땅,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건 이처럼 위대한 선조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에 대한 역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감사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구한 양규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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