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위인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입니다. 특히 세종대왕은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칭송받고 있죠. 그런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에도 세종 못지않은 뛰어난 성군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한국 역사상 세종 다음으로 성군이라 알려진 고려의 8대 왕 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글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 자료는 국사편찬 위원회 자료입니다.
사생아지만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핏줄 이어받아
현종은 992년에 왕건의 8남인 안종 왕욱과 천추태후의 언니이자 경종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혈통만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핏줄과 신라 왕실의 핏줄을 모두 이어받은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5대 왕인 경종의 왕비이자 자신의 조카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으로 혼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연 관계를 맺고 현종을 낳았다는 것인데요.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 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올렸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왕들은 과부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고 재혼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것 또한 별 문제는 아니었죠.
진짜 문제가 된 것은 선왕의 왕비이자 현 국왕의 누나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도 않은 채 삼촌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셈이죠. 현종은 어머니인 헌정황후가 현종을 낳은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인 왕욱 또한 현종이 5살일 때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종의 외삼촌인 성종은 그런 조카를 안쓰럽게 여기며 보모에게 현종을 기르도록 했죠. 그런데 부모를 모두 잃고 슬퍼하던 현종에게 얼마 후 또 다른 비극이 닥쳐왔는데요. 고아가 된 현종을 안쓰럽게 여기며 늘 보살펴주던 외삼촌 성종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죠.
현종의 위기와 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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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대 왕인 경종의 아들 목종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현종이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왕족이었으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는 자신의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경종의 다음 왕으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종이 자신들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있었죠. 게다가 가뜩이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현종이 영특하다는 소문까지 나자 위기감을 느낀 천추태후는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한 뒤 양주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습니다. 이후에도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간신히 목숨만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나마 국왕인 목종이 평소 현종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추태후가 암살 시도를 할 때마다 계속 방해를 하며 필사적으로 현종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후 목종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해 절에서 지내고 있던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그를 보호하는 한편, 서경의 도순검사 강조에게 현종을 보호할 것을 명하며 개경으로 그를 불러들이게 되죠. 그런데 개경으로 오던 강조는 갑자기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천추태후를 실각시킨 후 현종을 고려의 8대 국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왕위에 오른 현종이었지만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훗날 성군이라 불릴 만한 대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거란의 고려 침략
그는 먼저 문무 관료체계를 새롭게 재편하고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줄여주었으며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죠.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 평가받는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해 온 것입니다. 요나라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들의 속셈은 고려가 송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는데요.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강조가 30만 대군을 몰고 나가 맞섰습니다. 초반에는 고려군이 우세한 상황도 있었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요나라 군대에 패배한 강조는 결국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죠. 그 후 피난길에서 지방 관리들에게 모욕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삼한벽상공신 양규
이때 멸망의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고려의 명장 양규였는데요. 양규는 총 7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수많은 거란군을 사살하고 사로잡혔던 고려 백성 3만 명을 구출해 내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현종을 지켜냈고 요나라에 큰 피해까지 입히면서 결국 전쟁을 끝내게 되죠. 현종은 양규의 공을 기려 그에게 삼한벽상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려주는데 이것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건국 공신들에게 내려줬던 칭호와 같다고 하네요. 고려 역사상 최악의 위기라고 불리는 거란의 2차 침공을 막아내면서 고려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현종 또한 본격적으로 왕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현종과 고려에게는 아직 마지막 시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종의 청야전술
바로 거란이 현종 9년인 1018년에 세 번째 침략을 해온 것인데요. 소배압을 총대장으로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온 거란 군은 개경과의 거리가 불과 4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신은현에 도착했죠. 중간에 고려군의 매복에 당하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고려의 왕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리하게 남쪽으로 병사들을 끌고 왔는데요. 요나라 군은 당연히 이번에도 고려의 왕이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현종도 순순히 물러나주지 않았습니다.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서 성 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들판에 있던 곡식과 집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쌀 한 톨조차 얻지 못하게 만들었죠. 그 후에 성의 수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소배압이 정찰 삼아보는 300명의 기병을 100명의 기병으로 야간 기습해서 전멸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100명의 기병이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사기가 오른 적들이 총공격을 해올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한 셈이었는데 다행히 전투가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죠.
강감찬과 귀주대첩
기가 꺾인 거란군은 결국 뒤로 물러나게 되는데요. 이때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병력이 이들이 물러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로에 지친 거란군을 박살 내버렸는데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당대 최강국이던 요나라의 침략 전쟁을 2번이나 막아내면서 주변국들 사이에서 고려의 위상은 예전과는 180도 달라지게 되죠. 덕분에 이후로 몽골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1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누구도 고려를 건드리지 않게 됩니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으며 송나라에서도 고려의 황제 칭호를 인정했다고 하죠. 이후 현종은 평화를 바탕으로 수많은 업적들을 세우게 됩니다.
현종의 업적
동여진의 해적이 100 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자 그들을 토벌해 버린 후 수백 척에 이르는 함대와 수군을 만들어냈으며 엉망이었던 고려의 지방 제도를 정비해 5도 양계 체제를 만들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했죠. 그리고 각 주마다 창고를 설치하는 주창수렴법, 70세 이상의 부모를 가진 백성의 군역을 면제해 주는 면군급보법, 군인의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구분전등의 구제법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기록인 고려 실록을 다시 편찬하고 팔만대장경의 원본으로서 고려 불교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초조대장경을 간행했으며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는 등 엉망이 된 고려의 문물을 다시 정비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성들은 성의 수비 범위가 작아 적에게 쉽게 공략당하는 단점이 있었는데, 현종이 이것을 깨닫고 재위 20년에 무려 23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 도시 전체를 둘러싸 버렸습니다. 현종이 정비한 이 도성제는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며 조선 왕조의 수도인 한양의 도성을 짓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현종이 요나라의 침입을 두 차례나 막아내고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한 결과 고려는 이후 약 백여 년의 시간 동안 태평성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고려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현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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