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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고려 무신 차별과 김훈 최질의 난 그리고 권서경유수판관 이자림

by 궤적76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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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살펴볼 인물은 김훈과 최질인데요. 두 인물을 한꺼번에 다루는 이유는 이 둘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김훈과 최질의 출생연도나 출신에 대해선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의 초기 행적은 매우 훌륭했죠. 1010년, 요나라의 황제 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략하면서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김훈 최질의 난

김훈의 활약

드라마에서 최질
드라마에서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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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강조는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통주에서 20만의 요나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고려의 주력군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면서 고려는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되죠. 김훈과 최질은 바로 이때 아주 값진 활약을 펼쳤던 인물들입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통주에서 강조의 고려군을 대파한 요나라 군은 그 기세를 타고 퇴각하는 고려군을 멀리까지 추격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때 좌우기군 장군이었던 김훈 등이 완함령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요나라군이 지나갈 때 급습해 쳐부수자 요나라군이 잠시 퇴각했다고 합니다. 통주 전투에 승리로 기세등등해진 요나라군의 진격을 잠시나마 멈추게 만든 값진 전공을 세웠었던 것이죠.

최질의 활약

최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 요나라군은 통주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노전 등을 통주성으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고 하는데요. 그러자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중랑장 최질 등이 분연히 일어나 노전을 억류한 뒤 항전을 주장했고, 이후 방어사 이원구, 부사 최탁, 대장군 최온겸, 판관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닫고, 붙게 지켜 결국 통주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공을 세우게 되죠. 이후 김훈과 최질은 이때의 전공으로 여러 차례 무관 관직에 임명되어 상장군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김훈과 최질의 난' 배경

고려사 양규열전
고려사 양규열전 최질에 대한 기록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최질은 문반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의외로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질의 불만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되죠. 기록에 따르면 제2차 여요전쟁 이후로 군비가 크게 증액되면서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지자, 1014년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현종의 허락을 받아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은 뒤, 그것을 관리들의 녹봉에 충당시켰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2차 여요전쟁을 겪은 직후다 보니 재차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기 위해 많은 수의 군대를 항시 유지하느라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여 관료들에게 녹봉을 못 줄 정도로 재정 문제가 심각했었던 모양입니다.

무신과 문신의 대립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최질을 포함한 여러 무장들의 불만을 폭발시키고 말았죠. 아무리 나라의 재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의 녹봉을 충당한다는 건 대놓고 무신을 천시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전쟁으로 비대해진 무신 세력을 경계한 문신 세력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해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크게 분노한 최질은 그해 11월, 상장군 김훈, 박성, 이협, 이상, 이섬, 석방현, 최가정, 공무, 임맹 등의 무장들과 함께 군사들의 분노를 부추긴 뒤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궁궐에 난입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원흉인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잡아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죠. 훗날 발생하게 되는 무신정변과는 달리, 의외로 대대적인 살육전은 없었고 무력시위 정도만 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궁궐 난입

고려사 황보유의열전 기록
고려사 황보유의열전

이후 이들은 왕의 편전 안까지 들어가 현종을 면담하고는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황보유의 등이 우리들의 영업전을 빼앗은 것은 사실상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 일이지 결코 조정의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발의 억지로 맞춘다면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니, 창하옵건대 나라를 좀먹는 자를 없애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소서... 이에 현종은 그들이 궁궐을 장악한 상황에서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유배 보내게 되죠. 이렇게 해서 김훈과 최질을 포함한 무신들이 고려의 조정을 장악하게 되는데요. 이후 김훈과 최질은 다시 현종을 협박하여 상참관 이상의 무관들은 모두 문관을 겸하도록 했고 또한 어사대를 폐지하고 금오대를 설치하였으며, 삼사를 폐지하고 도정서를 설치하였습니다.

권서경유수판관 이자림

당시 이들이 감찰기구인 어사대를 폐지한 이유는 반대 여론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였으며, 재정기관인 삼사를 폐지한 이유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천하는 그리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김훈과 최질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을 무렵, 이자림이란 인물이 화주방어사로 있다가 임기를 마친 후 막 개경에 돌아와 있었는데요. 김훈과 최질의 반란에 격분한 그는 몰래 김맹이란 자를 찾아가 이렇게 귀뜸하였다고 합니다. 주상께서 어찌해 한 하라 고조가 운몽을 순유한다고 하고서 한신을 체포했던 일을 본받지 않는가? 간단하게 풀이하자면 김훈과 최질이 장악하고 있는 개경에서 그들을 처리하긴 어려우니 다른 곳으로 그들을 유인하여 쉽게 처리하란 겁니다. 그러자 뜻을 알아챈 김맹은 이 말을 은밀히 현종에게 보고하였죠.

죽음으로 끝난 무신의 난

고려사 왕가도열전
고려사 왕가도열전 기록

이에 현종은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으로 임명한 뒤 먼저 가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급히 지시하였습니다. 김훈과 최질을 서경에서 처리하려고 한 것이죠. 이후 다음 해인 1015년 3월 현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장락궁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요. 왕의 행차이니 당연히 김훈과 최질도 현종을 따라갔겠죠. 그리고 잔치 도중에 김훈과 최질이 거하게 취하자 이자림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김훈과 최질을 포함한 18명의 무장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때 최구라는 문신도 죽임을 당했는데요. 이유는 병부낭종 직에 있으면서 현종을 호종했으나, 성품이 거칠고 천박해 최질과 교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김훈과 최질의 천하는 약 5개월 만에 끝이 났습니다.

영향은?

그리고 그들을 처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자림은 이후 고속 승진하며 왕씨 성을 하사 받았고 훗날 현종의 아들인 덕종이 즉위한 후에는 그의 장인이 되게 되죠. 한편, 현종은 무신들이 엄연히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음에도 그들의 아들들과 형제들에게 가벼운 처벌을 내린 것 외에는 가족과 친척들을 모두 살려주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김훈과 최질의 난을 겪으며 많은 교훈을 얻었는지 이후 여요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자들과 전사자 가족들에게 후한 포상을 해주는 등 군인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죠. 김훈과 최질이 일으킨 반란은 일단 동기는 개인적으로 정말 이해가 갑니다.

마무리

고려사 왕가도열전
김훈과 최질

고려를 지키기 위해 기껏 죽을 각오로 싸우고 심지어 전공까지 세웠는데, 더 많은 상을 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군 복무의 대가로 받은 영업전까지 뺏어서 문신들의 녹봉을 준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을까요? 이처럼 무신 차별적 정책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점을 보면 훗날 발생하게 되는 무신정변과 굉장히 유사해 보이는데요. 마치 고려 의종 시기에 발생한 무신정변의 베타 버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는 점과 훗날 발생하게 되는 무신정변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들을 고려하면 김훈과 최질의 난은 초기에 진압된 것이 정말 다행으로 보이는데요.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제3차 여요전쟁까지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인 만큼 제2차 여요전쟁과 제3차 여요전쟁 사이에 일어났던 김훈과 최질의 난도 어떻게 묘사되어 나올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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