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유배 보낸 현종을,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낸 고려의 충신, 하공진은 진주 하씨로 시랑공파의 시조가 될 정도로 나라를 지켜낸 공이 큰 인물입니다. 고려가 500년 가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실제 고려사를 통해 하공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랑장 하공진
하공진은 경상남도 진주 사람으로 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가 되었다가 목종 때 이르러 중랑장으로 임명됩니다. 정 5품 무관직으로, 중앙군 직제로는 장군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었죠. 목종이 궁궐의 화재로 병이나 자리에 눕자 하공진은 친종장군 유방과 중랑장 탁사정 등과 함께 침전 근처에서 늘 당직을 섰습니다. 그만큼 목종은 하공진을 신임했고 하공진은 언제나 고려를 생각하는 무장이었습니다.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으로 옮겼는데,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개경 근처로 다가오자 하공진은 탁사정과 함께 강조의 편에 서게 됩니다.
하공진의 흑역사
1010년 5월 상서좌사낭종으로 있으면서, 고려에 입조한입조 한 여진족 95명을 죽인 죄로 유배당하게 되는데 사실 하공진은 동서계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해 동여진의 촌락을 공격했다 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공진은 이를 두고두고 한탄했죠. 그래서 입조 한 여진족을 모두 참살해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이를 혹자는 하공진의 흑역사라 말합니다. 당시 고려라는 나라를 보게 되면, 북방은 거란과 여진족이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해 약탈해 가는 게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무장이라면, 여진족을 보자마자 화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입조를 했다 해서 여진족의 죄를 없던 일로 해 준다면, 고려를 끔찍이 생각한 하공진에게 그만큼 분통 터지는 일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공진을 유배 보내는 현종
어쨌든 현종은 이 일로 하공진에게 죄를 물어 먼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며 전쟁을 일으키자 하공진의 유배 생활은 끝이 나고 복직됩니다. 하지만 하공진이 전장에서 싸우기도 전에 강조가 거란군에 대패하고 다급해진 현종이 남쪽으로 몽진을 가는데, 거란의 추격대가 턱밑까지 따라오는 위기의 순간 하공진이 몽진 일행을 따라잡고 현종에게 이르길 "거란은 본래 적도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이제 강조가 잡힌 마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면 저들은 반드시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현종은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게 되죠. 하공진과 고영기에게 표문을 가지고 거란 진영으로 가게 합니다.
고려에 대한 충심
하공진이 창화현, 지금의 경기도 양주로 가서 표문을 낭장 장민과 별장 정열에게 주며, 거란군영으로 가서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국왕께서 와서 뵙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나, 다만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어려운 국내 사정 때문에 강남으로 피난 가고 있으므로 저를 보내어 사유를 말씀드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황송하고 두려워 감히 앞에 나오진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속히 군사를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미처 거란 군영에 닿기도 전에 거란의 선봉이 창화현까지 진군해 현종의 목숨이 촌각에 달리게 되죠. 서둘러 하공진은 거란에 자세히 설명하자 거란 성종이 고려의 국왕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지금 남쪽으로 가고 있는데, 계신 곳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거란에서 억류
다시 현종이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묻자 하공진은 "고려의 남쪽은 너무나 멀어서 몇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죠. 고려의 남쪽에 대해 익숙지 못한 거란은 추격을 멈추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듬해,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회군을 요청하자 거란 성종은 하공진의 말을 듣고 허락한 뒤 하공진과 일행을 억류하게 됩니다. 고려의 산천을 잊지 못한 하공진은 거란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다시 고려로 돌아갈 계획을 꾸밉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거란 성종의 의심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란 성종에게 거짓으로 충성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임하자 하공진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의심을 풀게 됩니다.
하공진의 탈출 계획
은밀히 하공진은 고영기와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마치자, 거란 성종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이미 망한 처지이니 저희들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국정을 사찰하고 오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이를 허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 현종이 국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거란 성종은 고영기를 중경에, 하공진을 영경에 살게 하고 양가의 딸을 배우자로 삼게 해 주죠. 다시 기회를 엿보던 하공진은 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좋은 말을 많이 사게 됩니다. 이는 고려로 가는 길목마다 말을 배치해 둬서 말이 지칠 때가 되면 기운이 넘치는 말로 갈아타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아쉽게도 어떤 자가 계획을 고발해 버립니다.
하공진의 죽음
화가 난 거란 성종이 하공진을 국문하자 사실대로 말하며 이르길 "제가 우리나라에 대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살아서 거란을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거란 성종이 의롭다고 여기고 풀어주며 절개를 바꿔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설득했으나, 하공진은 더욱 강경하게 거센말로 답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거란 성종은 마침내 그를 죽이고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후에 현종이 교서를 내려서 그의 공을 기록하고 고려에 대한 충심을 기리며 그의 아들 하측충에게는 녹봉을 올려주고 1012년 문정 6년, 그의 아들 하측충에게는 5품직을 뛰어넘는 관직을 주며 이런 교서를 내리게 됩니다.
좌사낭중 하궁진은 통화 28년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의 군영으로 가서 세 치의 혀를 휘둘러 대군을 물리쳤으니 공신각의 초상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그 공헌을 기록하고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합니다. 이상 나라를 지키다 희생한 구국의 영웅 하공진 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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