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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김은부가 고려의 권력을 쥐는 과정

by 궤적76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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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지지해 준 김은부는 현종의 아내가 되어 원성왕후, 원예왕후, 원평왕후라는 세 명의 딸을 아버지며, 또한 덕정, 정종, 문종, 정강왕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현종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현종은 아주 많은 권력을 주었기 때문에, 단지 몽진 길에 도움을 준 것으로 그가 가진 권력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형부시랑 김은부

신라 왕실의 후손 김은부

고려의 제2의 왕족
신라 왕실의 후손

인물과 권력 관점에서 살펴보는 역사는 늘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왜 현종은 김은부를 강력한 세력으로 만든 것일까요? 그리고 김은부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까요. 다른 의견이 있는 분들께서는 꼭 댓글로 남겨주세요. 김은부는 사실 신라 왕족인 김긍필의 아들로 태어났고, 신라 왕실의 후손입니다. 그는 수조 안산현, 현재의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어요. 거란 성종은 강조의 정변과 목종의 시해를 이유로 고려를 침략하면서 40만 대군을 이끌었는데, 현종은 이를 막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 패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렇지만 고려를 건국한 시대는 호족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 아직 중앙집권체제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몽진 길에 만난 공주 절도사

거란의 고려 침략 이유
절도사

그래서 몽진 길에 위협을 당하자, 여러 신하들이 놀라고 겁이 나서 현종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을 가거나 장곡역에서 유숙을 할 때 전주 절도사 조용겸의 무리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공주는 거의 유일하게 달랐습니다.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웅긴 나루에서부터 현종을 맞이하였고 공주에 들어오자, 김은부는 정성을 다해 깨끗한 옷과 허리띠 그리고 지역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고을 아전들이 다 도망가서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김은부가 직접 나서서 식사 준비를 하게 됩니다. 원래 절도사라는 관직은 중국 삼국시대에 군량 운반과 총괄을 담당하는 관직을 시작으로 보는데 당나라 때 이르러 철도사의 힘은 군사와 민정을 아우르는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죠.

현종 개경으로 돌아가기 전 공주에 머물러

김은부 원성왕후
기득권과 다른 세력과 결탁

995년 고려 성종 때에 이르러 공식적인 지방관 명으로 채택되고 전국은 10도, 12 절도사를 두게 되는데 그럼 고려의 절도사도 그랬을까인데 현종의 몽진 길에 전주 절도사 조용겸이 자신의 군사를 동원했다는 점에서 아마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공주 절도사도 어느 정도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거란이 물러가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현종은 공주에 들르게 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주에서 무려 6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합니다. 무너진 고려를 세우기 위해선 하루빨리 개경으로 올라가야 했지만, 오랜 시간 공주에 머무를 이유는 단지 공주 절도사의 따뜻한 환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종과 공주 절도사

자신을 지켜줄 세력이 없었던 현종이, 적대관계에 있는 호족들을 대신할 대한 세력을 찾았고, 공주 절도사와 유대관계를 맺어 당장 보호해 줄 세력을 만들고 개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생각해 본 것이니 다른 의견이 있으면 편하게 남겨주세요. 이때에 김은부가 그의 맏딸을 시켜 어의를 지어 바쳤고 현종은 김은부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맏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 김 씨였습니다. 그 이후 두 명의 딸을 더 후비로 들이게 되죠.

종 2품까지 올라

왜 김은부를 사신으로 보냈을까
조정에 가득한 호족 출신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데 먼저 자신을 위협했던 절도사제도를 폐지합니다. 그리고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 형부시랑으로 임명하고 지방개혁을 단행하다가 거란의 동향을 살피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김은부를 거란에 사신으로 보냅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길인데, 왜 장인인 김은부를 보내게 됐을까요? 아마도 고려 조정에서는 김은부가 현종을 대표하고 있고 호족이 득실득실한 조정에선 현종을 제거할 수 없으니 현종의 권위를 누르기 위해, 김은부를 보내게끔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김은부는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지만 살아서 돌아와 종 2품의 고위직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현종 후비만 13명

혼인정책
고려 시대 근친혼

그리고 김은부는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데요. 이 모든 건 현종이 만들어 준 권력이죠. 여기에 기존 세력을 대신할 대안세력이 필요했던 현종은 태조 왕건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혼인 정책을 쓰게 됩니다. 현종은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기를 맞이했는데, 무려 13명이었죠. 후비의 지역 출신을 보면 서경에 속하는 후비는 한 명밖에 없었는데 경주에서 세 명, 안산에서 세 명, 인천에서 한 명, 청주에서 한 명, 양주에서 한 명, 광주에서 한 명, 황주에서 한 명이 대표적이죠. 이일을 혹자는 서경 세력이 몰락하고 경주, 신라 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는데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한벽산공신

궁궐 그림
새로운 세력으로 왕권을 강화한 현종

앞에서 보여준 현종의 행보를 짐작해 보면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죠. 그동안 고려 왕실이 근친혼으로 맺어지다 보니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죽거나 승려가 돼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천추태후가 끊임없이 죽이려 했지만, 도와줄 호족이나 외척이 없어 현종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지켜줄 세력이 절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한벽산공신이라 말하면, 고려창업 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을 말하는데 현종은 이 공신들을 벽산공신이라는 공신호를 만들어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에게 내리게 되죠. 이 부분도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게 창업 공신과 비슷한 공신호를 내림으로써 나의 권력과 권위가 태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건 아닌가 싶습니다.

마무리

결국 현종의 권력 재편으로 김은부가 등장했고 고려 거란 전쟁 이후 이제 새로운 외척 세력이 고려 사회를 이끌어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기록과 사건들을 종합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권력을 갖게 되는 김은부에 대해 알아보았고요. 고려 역사에서 권력의 이동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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