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이는 흥미로운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SF의 장르를 가져와서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담고 있는데요.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복잡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도, SF 장르의 특색을 살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강조되는 것은 인간 사이의 관계 특히 모녀 사이의 관계뿐인데요. 그런데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역전되어서 나타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계속 전쟁에 나갔던 건 나 때문이었어요. 난 어릴 때 폐에 종양이 생겼거든요."
정이에게 서현은 말 그대로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서현은 나이가 어린 데다 폐암에 걸려 그녀를 지켜줄 부모가 필요했죠. 그래서 정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서현을 지켜냅니다. 하지만 서현이 수술을 받던 날 정이는 마지막 작전에서 실패한 후 뇌사에 빠집니다.
"우리 딸이 수술 들어가기 전에 저한테 인형을 하나 줬었는데요."
엄마를 지켜줄 거야. 그녀가 작전해서 실패한 원인은 역설적으로 딸 서현이 준 인형 때문에 딸이 선물한 인형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이 그녀의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정이는 전투 안드로이드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실 인형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정이에게 전투력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반대로 그녀의 실패에 결정적인 이유기도 하며 그녀의 전투 능력은 서현 때문에 발휘되기도 했지만, 서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엄마 나 때문에 제대로 자기 인생도 못 살았는데 나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었을까?"
이제 서현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뇌사상태에 빠져 병원에서 잠들어 있죠. 그리고 그녀는 폐암이 다시 재발해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남은 상황이에요."
"길어야 세 달입니다."
사실 안드로이드 실험 초기 서현은 병원에 누워 있는 정이와 실험 대상인 AI 정이를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그녀의 진짜 어머니는 병원에 누워 있으니 AI 정이는 단순히 프로그램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이죠.
"면담 끝 17호 패기"
상훈이 정의의 다리에 총을 쏴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의의 전투 능력이 모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정이의 존재가 AI에서 어머니로 다가옵니다.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오히려 진짜 어머니는 누워있는 정이가 아니라 AI 정이로 바뀌는 순간인데요. 그런데 정이는 단순히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녀는 윤서현의 딸이자 어머니입니다. 마치 과거 정이가 윤서현을 지키려 노력했던 것처럼 반대로 윤서현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투형 AI로 다시 태어난 정이는 사실상 어린아이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AI라는 실체도 모르고 계속해서 연구원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죠. 그녀가 느끼는 감각 고통 모든 것들이 연구원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프로그램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과거 윤서현보다 더욱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윤서현은 정이를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 엄마 나 때문에 제대로 자기 인생도 못 살았는데 나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었을까?"
사실 윤서현에겐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연 어머니 정이는 행복했을까?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윤서현의 인생도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듯 보이고 치료비를 대주고 있는 크로노이드사 회장에게 너무도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서현아 너도 그만 집착해 "
그리고 이제는 재발한 폐암으로 죽을 운명에 빠져 있죠. 어쩌면 그녀는 자기 삶에 지쳤는지 모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 정이 역시 딸 서현을 위해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서현에겐 자신의 인생도 그리고 어머니 정이의 인생도 가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윤서현은 정이에게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자신만 생각하면서 살아요. 자유롭게 살아요."
아픈 딸이 없는 새로운 미래를 말이죠. 그래서 정의를 탈출시키기 직전 일부러 모성 부분을 제거합니다.
"딸에 대한 기억은 다 지웠어! 이제 윤정이 팀장은 자유야 "
상훈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 대사는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정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찾길 원하는 서현의 마음을 담은 것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은 정이가 윤서연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가장 큰 해피엔딩이니까요?
유머 예술적 감각 미적 취향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AI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체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피와 살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이 영화에서 인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진짜 인간인 것이죠. 그래서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뇌사상태의 정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인간은 서현에게 딸이면서 어머니인 AI 정이인 것이죠. 수없이 복제된 AI 중에서 서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정이만이 그녀에게 어머니이자 딸입니다. 그래서 AI 정이의 겉모습이 로봇으로 바뀐 것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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