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바스키아라는 화가의 작품이 한화 1248억 원에 낙찰되었다. 바스키아는 짧은 작가 활동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현시대에서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며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에 대해 알아보자.
해부학책과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 미술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많은 미술관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들을 접했다. 특히나 어머니가 좋아하던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다 8살 때 길거리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갑작스레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때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고 비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게 된다. 한 달가량 입원을 하게 되어, 그의 어머니는 책을 선물해 주는데 그중에 "그레이의 해부학"이라는 책이 있었다. 비장 제거 수술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고, 그와 함께 받은 해부학 교과서도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 자리 잡은 듯하다.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해골 형태의 인물, 신체 부위 등의 모습들이 자주 보인 것, 그림 속에서 종종 비장이라는 단어와 자동차 등의 그림을 자주 보인 것, 음악에도 관심이 많던 그가 나중에 밴드를 결성할 때 이름도 그레이라고 지은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스키아와 SAMO
입·퇴원을 겪는 사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 데다 그토록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던 어머니는 아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는 아버지와 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반항의 사춘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게 된다. 결국 집을 나와 살며 알디아즈라는 친구와 함께 SAMO라는 크루를 결성한다. SAMO(Same Old Shit)는 약자로 그게 그거, 별것 아님, 진부한 것들 등을 말하는 속어다. 그들은 뉴욕 소호 거리의 벽, 지하철, 클럽의 냉장고, 문, 화장실 등을 캔버스 삼아 반항적, 철학적 메시지와 그림들을 남긴다. 이때 작품들은 바스키아가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문짝을 떼가 거나 그림의 일부를 훔쳐 가는 등의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들의 그라피티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견해차로 해체를 결정하며 "SAMO is Dead"라는 그라피티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해체를 알린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만남
바스키아는 어릴 때부터 유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흑인, 거리, 낙서 등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중산층 가정에서 여유롭게 산 편이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인물들의 역사를 살펴보며 흑인들이 느껴야 하는 차별을 느꼈고, 작품 속의 인물, 구경하는 이 모두 백인이라는 것을 느끼며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과 흑인 영웅과 존경의 의미를 담은 왕관을 함께 그린다. 그가 그토록 유명해지고 싶었던 건, 흑인으로서 보란 듯이 우뚝 서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중 우연치 않게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앤디워홀에게 강매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난 앤디워홀은 그토록 바스키아가 원하던 유명한 삶을 준 장본인으로 바시키아의 삶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드나들도록 하고, 그의 재력, 인지도, 마케팅 실력 등을 이용해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그의 작품들이 큰 인기몰이를 하면서 그의 스튜디오로 찾아온 컬렉터들은 미완성 작품까지 쓸어갔다고 한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우정
앤디워홀과는 조력자 이상으로 소울메이트 같은 관계를 형성하며 활동하게 되는데, 앤디워홀에게는 20년 동안 활동을 하며 고갈되는 창작의 샘에 열정과 에너지를 채워주던 존재, 바스키아에게는 아버지 이상의 영적 후원자라고 말하며, 실제 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고, 바스키아의 가족사와 예술적인 공감도 함께 나누며 우정 이상의 관계를 쌓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에게 돈독한 우정과 가족 이상의 관계였던 이들이 멀어지게 되는데, 그 둘이 계획하던 대규모 공동 전시가 실패하게 되었고, 둘을 향한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앤디워홀이 바스키아를 이용해 먹는다", "앤디워홀과 바스키아가 동성애자다" 등 숱한 소문들이 무성했고, 갑작스러운 불편한 관심들은 바스키아를 힘들게 했다.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그렇게 바스키아와 앤디워홀의 관계가 멀어진다. 그러던 중, 앤디워홀이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며 소식을 알리고, 그 후 1년 뒤 바스키아도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가 27세이다. "피카소의 대를 이을 구세주"라는 매스컴의 찬사를 받으며 흑인으로선 미술계에서 처음으로 부와 명예를 얻었던 바스키아, 그가 원하던 대로 유명해졌지만, 너무나 빨리 찾아온 탓일까? 아니면 그가 흑인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불편한 관심 때문이었을까? 천재로 인정받던 화가는 요절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은 인정받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천재였기에, 짧았기에, 묵직하고 대담했기에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들은 힘을 잃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가 보다. 지금까지 검은 피카소 장미셸 바스키아였습니다.
'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동 전쟁의 이유 팔레스타인은 민족이 아니라 지명 (2) | 2023.10.09 |
---|---|
요기요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배달특급 배달 앱 가격이 모두 다르다. (0) | 2023.10.08 |
707 특수임무단 국가 지정 대테러 부대 역사와 장비 (0) | 2023.09.23 |
혼자서 이름 바꾸기 전자소송으로 개명 허가 신청서 제출하는 방법 (0) | 2023.09.04 |
아르곤연구소 마이클노먼 박사, 인도공과대학교 아와나 교수 보도 자료 (0) | 2023.08.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