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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유진벨과 후손들 윌리엄 린튼 휴 토마스 제임스 스테판 존 빌 데이비드

by 궤적76 2023.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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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요한 박사님의 가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줄로 이야기하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가문입니다. 린튼가는 유진벨 선교사님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유진벨 가문 또는 린튼 가문이라고 부르죠. 해당 가문과 대한민국은 어떤 인연인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린튼가문

유진벨 선교사

조선의 병원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에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어요. 그중에서도 유진벨 가문은 4대를 이어 한국을 섬기는 가문인데요. 유진벨 선교사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유진벨 선교사님은 '배유지'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렸어요. 외국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곤란함 어려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지금은 굉장히 발전하고 깨끗하며 맛있는 음식도 많이 있는 살기 좋은 나라잖아요. 세계적으로 치안과 편의성이 뛰어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리에는 오물로 가득했어요. 위생적으로 불결했죠. 전염병도 많았던 시대였고요. 선교사님들과 가족이 전염병으로 죽는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한국 이름 배유지

유진벨
유진벨 선교사

또 외국인에 대해 두려워하고 배타적이었던 시대였죠. 외국인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러 왔는데 환경은 힘들고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한국인과 친구가 되기를 바랐던 거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교사님들이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지역을 돕는 일을 먼저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일을 더 열심히 하는데요. 마음이 열려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죠. 친밀해지기 위해서 이름도 배유지라는 한국 이름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그렇게 한국인을 돕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임신 7개월인 아내를 사별하게 돼요. 선교하러 이 나라에 오지 않았다면 아내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아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유진벨 선교사님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두 명의 아내를 잃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고 2년을 지내다가, 2년 뒤에 재혼하고 다시 한국의 목포로 돌아왔어요. 1919년 3.1운동이 있었죠. 3.1운동이 이어지다가 3월 31일에 계속되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려는 일본 육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9명의 민간인이 죽었어요. 제암리 학살 사건입니다. 그 제암리 교회에 조사하러 유진벨 선교사님의 아내가 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음을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유진벨은 이제는 정말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갈등합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유진벨 선교사님이 조선에 온 이유가 생명을 살리고 돕는 것이었죠. 그런 사람에게 가장 큰 동기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은 뭐 하는 거지? 날 선 경계의 눈치 바라봅니다. 더구나 또 사랑하는 아내까지 죽었습니다.

독립운동에 참여

3.1운동
일제의 민족 탄압

상실의 아픔으로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유진벨 선교사님은 그래도 한국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와서 목포, 광주, 전라도, 호남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는데요. 유진벨 선교사님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흥 소학교, 수피아 여학교, 숭일학교를 설립하셨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된 교회와 학교가 많았습니다. 유진벨 선교사님이 세운 학교의 학생들, 교회의 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두 번의 사별에도 조선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진벨 선교사님의 사랑 정신이 이어진 거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진벨 선교사님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출국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유진벨 선교사님이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많은 편지를 남기셨는데요. 편지로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낯선 문화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점점 사랑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니 밥은 맛이 없어요. 그러나 한국 음식을 먹기로 했어요. 친구가 되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어요. 청일 전쟁 후 콜레라로 죽는 사람이 하루에 50명에서 100명이 넘어요. 그래서 그들을 돕고 있어요. 이곳 사람들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양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쥐어짜고 있어요. 복음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들으려 하지 않아요. 이 백성은 복음 이외에 결코 희망이 없어요.

 

편지를 통해서 유진벨 선교사님의 갈등이 조금은 느껴지셨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하고 사랑하고 우리를 도왔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윌리엄 린튼

윌리엄 린튼
유진벨과 윌리엄 린튼

2대를 소개해 드릴게요. 윌리엄 린튼이라는 분입니다. 한국 이름은 '인돈'이라는 분이에요. 유진벨의 딸 샬럿과 결혼을 한 윌리엄 린튼은 21살의 나이에 한국으로 오게 됩니다. 48년간 이 나라에서 선교했는데요. 장인어른 유진벨이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교육에 힘쓰게 됩니다. 3.1운동을 미국 남부 지역에 알려서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인돈 역시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광복 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대학교를 세웠는데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분이 바로 윌리엄 린튼입니다. 인돈이 신사 참배로 한국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 있을 때 기업을 설립했는데요. 글로벌 생명 공학 기업인 프로메가라는 기업입니다. 2005년부터 매년 2만 5000달러씩 우리나라를 위해 지원하는 기업인데요. 지금까지도 한국과 북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휴 린튼

휴린튼
휴린튼 미군으로 입대한 모습

3대째를 살펴보면 휴린튼이라는 선교사님이에요. 한국 이름은 인휴입니다. 이분의 별명이 있어요. '순천의 검정 고무신' 3대째부터는 아예 한국 땅에서 태어납니다. 휴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리고 6.25 전쟁에서 미군 해군 장교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원래 군인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도 6.25 전쟁 때문에 피난을 가고 도망치던 시기에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 해군의 장교로 자원입대를 선택한 분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의 모든 인프라가 다 무너지게 됩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셨어요. 한국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바다를 땅으로 메우는 간척 사업을 하셨는데요. 그리고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어요.

휴 린튼의 아내 루이스

휴린튼의 아내 루이스
해군 휴린튼

앞서 휴린튼 선교사님의 별명을 말씀드렸죠. '순천의 검정 고무신' 휴린튼 선교사님은 늘 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그런데 구멍이 뚫릴 때까지 다 해져서 바닥이 보이는 구멍 난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구멍이 뚫릴 때까지 고무신을 신고 다닐 만큼 검소하게 사셨던 거죠. 아내인 루이스는 순천의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운 분인데요. 한국에서 40년간 선거하시며 결핵 퇴치에 전력을 다했던 분입니다. 왜 이분이 결핵 퇴치에 전력을 다했을까요? 이유가 중요한데요. 휴린튼과 루이스 사이에 아들들이 있었어요. 아들들이 다 결핵에 걸립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겨요. 더 이상 죽어가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최선을 다해 결핵 퇴치에 평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남편이 1984년 안타깝게도 개척교회를 세울 자재를 운반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아내 루이스 선교사님이 상황을 회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며칠 전 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죽기 전에 대화를 나눴어요. 그는 한국에서의 사역이 풍성하고 행복하다고 했어요."

토마스 린튼, 제임스 린튼, 스테판 린튼

토마스 린튼
제임스 린튼
스테판 린튼

3대째 다른 분들도 한국을 위해 선교하셨는데요. 토마스 린튼, 한국 이름 '인도아'라는 선교사님입니다.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졸업하고 나서 다시 한국 광주로 돌아와 의료 선교로 봉사합니다. 31년간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을 섬긴 분입니다. 그리고 4세째로, 넘어갈게요. 제임스 린튼은 북한 내에 있는 지하수 개발에 참여하고 있고요. 그리고 한국 이름 '인세반', 스테판 린튼은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분이에요. 인세반은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지역의 가뭄 수해를 지원하고 결핵 퇴치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4대째 형제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결핵에 걸렸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한국의 결핵 퇴치, 북한의 결핵 퇴치에 열성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거죠. 북한은 해마다 평균 3000명 정도가 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존 린튼(인요한), 빌 린튼(윌리엄 린튼 3세)

인요한
빌린튼
윌리엄 린튼 3세

앞서 휴린튼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요. 당시 한국에 앰뷸런스가 없어서 아버지가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생각한 그의 아들 존 린튼(한국 이름 인요한)은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구한 사람입니다. 존 린튼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죠. 여기에 글로벌 생명공학기업 프로메가의 빌 린튼 회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한남대를 꾸준히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윌리엄 린튼 장학연구기금을 통해 바이오 교육 및 인턴십, 관련 연구를 위해 12만 5000달러를 지원한 이력이 있는데요. 그는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올 때까지 꾸준히 인력을 키워내고 싶다고 덧붙였죠. 참고로 1978년 창업한 프로메가는 생명과학 연구 시약과 장비를 공급하는 매출 5000억 원의 글로벌 기업입니다.

린튼가의 5대손

데이비드 린튼
유퀴즈에 출연한 데이비드 린튼

마지막으로, 린튼 가의 5대손 데이비드 린튼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특별 귀화해 현재 한국의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인데요. 한국 기업의 해외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서울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를 비롯해 한국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지금이 월급이 제일 적다. 사랑으로 선택한 직업"이라고 말해 진행자들을 웃게 했는데요. 10년 전에도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된 이력도 있는 그는 조상님들보다 자신의 공로가 너무 적어 극구 방송 출연을 사양했다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흰 피부를 한 한국인 아저씨"라고 자신을 표현한 데이비드 린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한국인으로 귀화까지 한 걸 보면 그의 한국 사랑도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죠.

린튼 가족
선조의 동상 앞에선 린튼가 사람들

5대손에 이르기까지 한국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랑이 열렬한 린튼가. 린튼가의 후손들을 살펴보며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한국과 연관된 이력을 품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인데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각별한 한국 사랑에 마음 한구석이 찡해질 정도입니다.

 

 

 

유진벨 가문의 후손 존 린튼 인요한 박사님

지금부터 소개할 분입니다. 존 린튼이라는 분인데요. 한국 이름으로는 인요한 박사님이에요.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아는 분들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능에도 많이 출연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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